行星 S-4266



2011-08-24
http://gamm.kr/978 영화, 크리스 에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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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샤인 본 이후에, 크리스 에반스씨의 필모를 따라가다가 봤었던 영화. 딱히 별로 기대했던 건 아닌데, 굉장히 좋아하는 영화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특히나 "I Love You" 베스트로는 단연코 첫번째로 손꼽고 있어요.

 

의외의 배우분들이 나와서 처음 볼 때 조금 놀랐던 영화이기도 합니다. 무려 제이슨 스타뎀 아저씨가 나오시질 않나(ㅎ) 캐릭터명은 "베이트만". 여자 주인공인 "런던"역에는 제시카 비엘입니다. 딱히 좋아하는 배우는 아닌데, 여기서는 꽤 마음에 들었어요. 우리 에반스씨는 무려 남자주인공인 "시드"역. 스물한살. 런던과는 열아홉 때부터 2년 동안 사귄 연인 사이. 6개월 전에 헤어졌지만, 사귈 때는 둘의 관계에 대해 자신 쪽이 더 쿨한 것처럼 보였었지만, 헤어진 후에는 잊지 못하고 아주 대차게 찌질대고 있는 정도(ㅎ) 둘다 남부러울 것 없이 희희낙락 놀고 먹는 부유층 자제분들. 런던은 시드와 동갑인 듯.

 

이야기는 바로 런던이 LA를 떠나 뉴욕으로 가게 되는 전날의 송별 파티 소식을 다른 친구로부터 전해들은 시드가 막무가내로 파티장에 난입하면서 시작됩니다. 별로 동적인 스타일의 영화는 아니고, 주로 대화로 진행되는 영화입니다. 베이트만은 멀쩡한 금융권 종사자이지만, 자기 나이의 절반밖에 안되는 시드에게 마약을 배달해 팔러 온 역할. 전문 딜러는 아니고 시드가 급하게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연락이 된 모양이에요. 둘은 런던의 친구인 "맬로리"가 운영하는 바에서 만나는데, 혼자 파티장에 찾아가기가 좀 그랬는지 어땠는지 시드는 베이트만을 급꾀여선 런던의 송별 파티에 데려가게 되죠.

 

파티는 역시 런던의 친구인 레베카 "베키"가 부모님 집을 빌려 하는 것. 시드와 베이트만은 베키네 집앞에서 역시 런던의 친구(이지만 나이는 열일곱 밖에 되지 않은)인 "마야"를 만나서 같이 들어갑니다. 파티 시작 시각보다 한참 전에 도착한 탓에 시드와 베이트만은 2층의 화장실(이라고 해도 고급 맨션급 주택이라 크기도 엄청 크고 그냥 무슨 룸임)에 처박혀선 술을 마시며 베이트만이 가져온 약을 하는데, 그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죠. 그리고 중간중간 마야와 맬로리가 찾아와 그들과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주로 시드를 중심으로 런던과 관련된 이야기부터 해서, 신과 존재에 대한 이야기, 성(性)과 섹스에 대한 이야기 등등. 그러면서 이야기 중간중간 플래시백처럼 시드와 런던이 한창 사귀던 시점을 지나, 헤어질 무렵이 가까워진 정도의 둘의 모습을 짧게짧게 보여줍니다.

 

캐릭터가 죄다 그냥 놀고먹는 아무 생각없어 보이는 부유층 애들이고, 성인 등급의 대화 내용과 대사에는 무슨 F-word가 난무하는데다 영화 플레이 타임 내내 약이나 하고 술이나 퍼마시기 때문에, 도통 별 시덥잖은 영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은 이 영화는 그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을 뿐인데요.

 

정말로 진짜로, 살아가는 것, 사회의 인식, 가족과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 그리고 온갖 사랑과는 상관없는 그런 실제적인 이야기들과 고민들은 제껴둔채로, 극중 시드의 대사에서처럼 "그저 며칠이고 며칠이고 단둘이 침대에 틀어박혀 있어도 좋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일들조차도 아무런 상관이 없어지는 그런 "사랑"에 대해서, 그저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을 뿐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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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처럼 보여지는 시드와 런던의 컷들은 처음에는 아주 다정돋는 연인의 모습이 좀더 많이 차지하지만 횟수가 거듭될수록 서로 어긋나는 모습이 더 많아집니다. 그리고 런던에게는 다른 남자가 생기고 시드가 그걸 알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더 멀어지죠.

 

시드와 베이트만, 마야, 맬로리가 화장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시드와 런던도 플래시백 장면들에서 일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나오는데, 런던이 보다 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시드는 반대로 현실적이고 냉소적인 모습으로 런던의 이야기를 반박하죠. 그리고 "I Love You"라는 말을 고집스럽게도 한마디 제대로 해주지 않는 시드와, 그래서 런던은 더더욱 그 말에 집착하는 듯한 모습도 보이구요.

 

딱히 특별할 건 없는, 그저 흔한 연인들의 모습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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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장면은 시드 시점이기 때문에 런던과 헤어진 후의 시드의 모습도 한장면 나옵니다. 헤어진 후의 런던에 대해서는 친구들의 이야기와 영화 마지막 즈음에 런던 본인이 말하는 장면 밖에는 없어요. 런던의 입장을 이렇게 취급하는 것과 온통 런던의 친구들만 등장하는 점도 굉장히 마음에 드는 요소에요. 물론 그들이 시드를 알고 있긴 하지만 런던과 사귄 탓에 알게된 여자들이지 시드와 그 이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건 아닌 것 같으니까요. 게다가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의 차이도 있기도 하고.

 

어쨌거나 시드 혼자 등장하는 플래시백 장면은 거의 런던과 헤어진 직후인데, 상담의에게 상담을 받고 있는 장면입니다. 뭐, 별로 이 상담의는 시드에 대해 별로 걱정하지도 않고(ㅎ) 그저 돈많고 할일없고 생각없는 철없는 20대의 한순간의 불만 정도로만 흘려버리지만요.

 

물론 시드의 상태는 그 이후로도 계속계속 악화되어서, 헤어진지 6개월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는 집밖에도 제대로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 술과 약을 잔뜩 쌓아놓고 퍼마시고 취해선 런던과 사귀던 때를 계속계속 떠올리는 정도 밖에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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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와의 대화나 베이트만과 초반에 나눈 대화들은 런던과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었는데, 영화 중반부에 맬로리와 나누는 대화는 런던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서, 특히 영화 초반에는 정말로 "그저 돈많고 할일없고 생각없는 철없는 20대의 한순간의 불만 정도"로 보이던 것이 실제로 당사자인 시드에게는 굉장히 심각성을 띄고 있다는 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점이기도 하죠.

 

이 맬로리와의 대화 파트를 꽤 좋아하는데, 런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 말고도 멜로리와의 대화 초반의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도 좋아요. 영화에서 시드와 베이트만, 그리고 마야가 처음 시작하는 대화가 신을 보았느냐, 신의 존재를 믿느냐 하는 것인데, 이 신(God)으로 지칭되는 대화 주제는 플래시백 장면에서 런던과 나누는 대화에도 등장합니다. 종교적인 의미의 신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더 큰 범위의,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큰 주제 자체를 모두 아우르는 성격의 신(God)이에요. 일종의 에너지일 수도 있고, 믿음(Faith)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영화 전반에서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그것에 대해 옹호하거나 과장된 믿음을 보이거나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존재한다고 인정하고 있는데에 대해서, 시드 혼자 그들에게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그리고 그 개념은 "사랑"까지도 아우르는 것이라, 결국 시드는 사랑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죠. 인정하지 않으려 들고, 믿지 않으려 듭니다. 그것을 말로 내뱉어 구체화하지 않으려 들고, 구체화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해요.

 

하지만 실은 그것을 믿고 인정함으로써 생길지도 모를, 그것이 정말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그점을 두려워하는거지만.

 

2년여를 사귀었지만 런던에게는 다른 남자가 생기고, 그걸 알게 되고, 그 상황에 화를 내고, 그 남자에게 화를 내고, 런던에게 화를 내고, 결국에는 헤어지게 되지만, 실은 자신이 런던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신이건 에너지건 믿음이건 사랑이건 무엇이던 간에 자신이 머리로 인정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가슴이 메여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게 그렇게 힘들었던 거죠.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내려놓을 수가 없고, 런던을 잊을 수가 없고, 그녀를 더 사랑하게 되고, 그녀를 더 미워하게 되는 거에요.

 

파티장에서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고 겨우 런던과 단둘이 된 장면부터가 정말 멋진 장면들이에요. 물론 그전까지의 대화 장면들도 좋아하는 장면들이 많긴 하지만(ㅎ) 앞에서 말한 맬로리와의 대화 장면도 좋아하긴 하지만, 마지막의 베이트만과 고래고래 목청 높여 가며 했던 대화 장면도 좋아하는 장면(ㄲ) 이후에 런던과 단둘이 되는 장면을 제외하면 이 영화의 백미인 것 같음. 뭔 대화 내용이 이러냐- 할 수도 있지만, 그건 정말 문자 그대로만 보았을 때의 이야기이고, 그 정말 원초적이고 말초적인 내용으로 대놓고 "빅게임"으로 지칭되는 "사랑"을 연속해서 다루고 있으니까요. 플라토닉만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안그래? 이모티콘

 

Whatever we had when we were together, when we were in love…

우리가 함께였을 때 느꼈던, 우리가 사귀었을 때 느꼈던, 그게 무엇이든,

 

that feeling of just being able to lie in bed with someone for days and days

and not give a fuck about the outside world…

몇날며칠이고 누군가와 함께 침대 안에 틀어박혀 있어도 상관없을 것 같은,

다른 사람들도, 모든 일들이 그저 상관없을 것 같은,

 

…is gone.

그런 느낌이 사라져버렸어.

 

And I feel like there's nothing I can do to ever get it back.

그리고 다시는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없을 것 같아.

 

시드가 런던에게 한 대사. 이 영화에서 두번째로 좋아하는 대사와 장면. 이때의 런던의 반응은, 그저 적당히 이 시점의 시드에게 맞춰준 뿐이지만. 어쨌든 런던 역시 시드를 정말로 좋아했을 때가 있었을 테니까요. 영화의 타이틀은 런던이지만, 어찌되었건 이 영화의 시점은 시드인 걸. 런던도 시드와 비슷한 감정을 시드 이전에, 혹은 시드에게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어찌되었건 지금의 시점은 시드이니까.

 

런던에게 키스하기 직전의 시드의 표정도 참 좋아해요. 그 이후에 런던과 그날밤을 보내는 장면을 실제로 넣지는 않고, 시드의 기억과 추억과 환상으로만 구성한 장면도 멋진 편집이라고 생각해요. 차 안에서 대화를 시작하면서부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의 시퀀스는 정말 숨소리도 내지 않고 몰입할 수 있는 정도의 편집인 것 같달까.

 

그리고 이 시퀀스에 삽입된 "The Perishers"의 "Nothing Like You and I" 역시 완전 멋진 곡입니다. 선곡 정말 짱 멋지긔이모티콘

 

생각난김에 덧붙이지만, 오프닝곡과 엔딩곡을 포함한 삽입곡들이 다들 너무 어울리는데다 좋아서- 오프닝곡의 풀버전은 이쪽에서, 엔딩곡은 이쪽에서 들을 수 있네요. 그렇지! 사운드트랙을 사야겠다! 이모티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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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영화의 대미. 내가 본 영화 중에 가장 멋진 "I Love You"가 등장하는 장면.

 

단 세 단어일 뿐인데, 단 여덟 글자일 뿐인데, 왜 그걸 말해주지 않느냐고, 결국에는 울면서 말하던 런던의 벗은 어깨 위에 연필로 꼭꼭 눌러 차마 입밖으로 소리 내어서 말할 수 없는 그 여덟 글자를 쓰던 시드의 모습이 떠오르죠. 작별인사를 하고, 더이상 그녀는 자신의 연인이 아니고, 더이상 다른 것들은 아무 상관할 필요 없이 그녀와 단둘이 있어도 좋을 그런 관계로 돌아갈 수도 없지만-

 

그렇지만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녀를 사랑했었으니까, 인정할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더이상은 두려워하지 않을 거니까. 이제는 더이상 얽매이지 말고 내려놓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까.

 

"London, I Love You."

 

내가 에반스씨를 다시 보게 된 계기가 된 영화가 바로 이 런던이에요. 선샤인에서 먼저 접하긴 했지만, 처음에는 런던을 본 이후만큼은 배우한테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었는데, 이전 필모의 영화들("판타스틱4", "섹스 아카데미", "퍼펙트 스코어", "셀룰러" 순으로 본 이후에 런던을 보게 됨) 역시 딱히 새롭게 볼만한 건 없어서(ㅎ) 물론 재미는 있었지만 워낙에 유쾌하고 단순하기까지한 캐릭터를 주로 맡아서 이런 녀석이 어쩌다 대니보일 감독님이랑 일하게 됐지-라고 생각했달까(ㅎ) 그러다 "런던"을 보았는데, 정말 처음 감상이 그거였지. "우-와. 어떻게 이런 철도 안든 어린애 같은 놈이 이런 연기를 다 했지!" 진짜로 이렇게 생각했지 뭐에요! 이모티콘

 

선샤인에서도 그랬지만, 에반스씨 대사 치는 말투를 상당히 좋아하거든요. 런던은 특히나 대화 위주로 흘러가는 영화라 에반스씨 대사 졸 많아서 진짜 좋아요(ㄲ) 출연한 다른 영화들도 영화 자체나 캐릭터가 어쨌건 간에 에반스씨 대사 치는 건 다 좋아한달까(ㄲ) 정말 그래도 그점에 있어선 이 런던만한 영화가 없지(ㅎ)

 

아마 런던이 없었다면, 혹은 못봤다면, 크리스 에반스라는 배우에 대해선 딱히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겠지. 실은 선샤인 이후에는 국내 개봉작들("판타스틱4 실버서퍼편", "내니 다이어리", "스트리트 킹", "푸시" 순)만 챙겨봐서 이 배우가 딱히 연기를 탁월하게 잘한다거나 하는 생각까지는 하진 않았었는데 말이에요. 하지만 이번 "캡틴 아메리카" 이후에 다시 필모 훑어올라가서 국내 개봉하지 않은 영화들 DVD를 구해서 보고 있는데 좀 생각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참 필모가 전체적으로 애매하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자신이 생각하는 "연기"라는 것에 대해서 꽤 확실하게 기준을 잡고 있는 것 같고, 게다가 굉장히 성실하기도 하고.

 

응. 좋은 배우에요. 젊으니까 앞으로가 더 기대되기도 하고. "런던" 같은 영화를 더 많이 찍어주었으면 좋겠지. 물론 "판타스틱4"라던지, "캡틴 아메리카"라던지 이런 대형 영화에 출연하는 것도 좋지만! 이모티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