行星 S-4266



2011-07-05
http://gamm.kr/900 베네딕트 컴버배치, 벤투어

5월 3일에 보았는데, 두달만에 쓰는 리뷰 따위(...) 뭐, 리뷰-라고까진 할 순 없고 어쨌거나 그냥 포스트(ㅎ) 실은 중간에 두번 날려먹었더랬습니다. 쓰는데 하도 오래 걸리니까 한번은 쓰다가 멈추고 몇시간 뒤에 잊어버리곤 노트북을 그냥 꺼버렸고, 한번은 쓰다가 중간에 저장 버튼을 눌렀는데 네트워크가 끊겨서 날아가고이모티콘

 

그래도 난 굴하지 않겟서. 써버리고 말테야이모티콘

 

덧. 공개로 돌리고 전체적으로 다시 읽어보니, 뒤로 갈수록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만, 도저히 뭘 어떻게 더이상 수정할 여력이 없습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이모티콘 젱장 내 생각을 쓰는 것조차 왜 이렇게 어려워이모티콘

 


 

작년에 몇몇 온라인 기사들을 읽은 후에 썼던 "After the Dance" 포스트는 이쪽.

 

NT 아카이브에 어떤 주기로 이전 작품의 동영상분이 공개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벤투어 직전에 NT 아카이브에서 "After the Dance"를 볼 수 있다는 소식을 bc.co.uk 언니가 알려주셨기 때문에 정말로 예상치 못하게도 직접 보고 올 수 있었습니다. 이전 포스트 몇몇에서 언급했다시피 중화질도 채 못되는 동영상 파일에 작은 인치의 PC 모니터로 볼 수 있었을 뿐이지만, 그래도 앞으로 다시 하지 않을 베네딕트씨의 호평이었던 연극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행운이었달까. NT 아카이브에 대한 것은 벤투어 5일차 포스트를 참고.

 

작년에 "After the Dance" 포스트를 쓸 당시에 연극을 직접 본 분들의 리뷰는 거의 제외하고 대개 언론 기사 위주로만 읽었었기 때문에, 극의 개요나 분위기 같은 것만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상세한 줄거리 등은 전혀 모르는 채로 봤었습니다. 그건 좀 꽤 다행이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의 경우에는 어차피 원작이 있는 연극이고 해서 스크립트를 먼저 읽고 갔어도 크게 상관은 없었는데, "After the Dance"는 애초에 원작이 없는 연극이니- 별로 스포 경고 따위는 하지 않는 편입니다만, 어쨌거나 이 포스트에는 "After the Dance"의 결말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라인이미지

 

"After the Dance". 영국의 유명 극작가인 테런스 래티건(Terence Rattigan)의 작품. 시대적 배경은 1938년.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발발하기 직전. 극본이 쓰여진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듯. 전쟁이 실제로 터지진 않았지만, 언제든 전쟁이 일어나도 아무런 이상할 게 없는 정도의 분위기. 열혈한 젊은이들은 군에 자원입대를 하고, 그렇지 않은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이 헤메던 정도의 시대.

 

남자주인공인 데이비드 스콧-파울러(David Scott-Fowler)는 30대 중후반으로, 10대 후반 시절에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을 겪은 세대. 부모님이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극중에 정확히 언급되진 않은 것 같습니다만, 전쟁과 관련이 있거나 혹은 관련이 없거나 전쟁 기간 중에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꽤 부유한 집안이라 물려받은 재산이 상당해서, 그 시절에도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물질적으로 부족함은 전-혀 느끼지 않고 그때나 지금이나 매일 같이 방탕하게 파티를 열어 지내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어요. 일단 겉으로 내걸고 있는 직업은 역사 작가-랄까, 정확히 역사학자 같은 건 아니고,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책을 쓰는 것이 직업으로, 스스로는 꽤 그 일 자체를 좋아하고 잘하고 싶고 기록에 남을만한 훌륭한 책을 쓰는 것이 "꿈"인 사람. "목표"라고 말하기보다는 "꿈"이라고 말하고 싶달까. 물론 객관적인 평으로 보았을 때 데이비드가 쓰는 책은 주제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전혀 팔리지 않을, 전혀 그가 바라는 정도의 결과물을 내놓진 못하고 있지만, 대사 몇곳에서 이 사람은 이런 글쓰기에 대해 질려한다거나 의무감을 가진다거나 그런건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다만, 글쓰기를 포함해서 모든 상황에 조금의 열정도 가지지 못할않을 뿐이지.

 

부인인 조안 스콧-파울러(Joan Scott-Fowler)와는 결혼 12년차. 20대 중반 정도에 결혼했겠네요. 조안과의 나이 차이는 얼마 안나는 것 같습니다. 동년배이거나 한두살 정도, 많아봐야 5년 이내로 차이날 것 같아요. 둘은 결혼 이전부터 파티 등을 즐기던 무리에 같이 속해 있던 친구 사이였는데, 역시나 술에 잔뜩 취한채로 "우리 둘이 결혼하면 재밌겠지" 따위로 시작해서 결혼한 케이스(ㅎ) 조안은 실제로는 데이비드를 정말로 좋아하고 있었지만, 데이비드가 그 당시에도 뭔가 얽매인다거나 지루해진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고 그런 관계도 사양이었기 때문에, 조안은 자신이 데이비드를 정말로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 데이비드에게 맟줘서 어울리다 결혼에까지 이르게 된 관계. 결혼 이후에도 조안은 계속해서 지금까지 그런 사실을 숨깁니다. 극중에 실제로 장면이 표현되거나 한 건 아니지만, 대사 등으로 짐작해볼 때 데이비드는 12년간의 결혼 생활 중에도 파티 등에서 만난 다른 여자들과 가볍게 관계를 맺기도 했을테고, 그때마다 조안은 "쿨한 아내" 역할에 아주 충실했던 것 같아요. 자신이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데이비드가 12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라고 믿고 있는 정도.

 

데이비드의 조카인 피터 스콧-파울러(Peter Scott-Fowler)는 20대 중반 정도. 역시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고, 데이비드가 후견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데이비드처럼 파티를 즐기고 인생을 낭비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은 아직 하지 못하고 데이비드에게 얹혀 살고 있는데다, 되려 주급 10파운드를 받으면서 데이비드의 서기-랄까, 타이프라이터 역할을 하고 있어요. 데이비드가 구두로 책의 내용을 불러주면 피터가 수기로 기록했다가 타이프를 쳐서 데이비드에게 보여주고, 데이비드는 그걸 다시 읽고 교정하는 그런 과정으로 책을 쓰고 있죠. 시대적 상황에서 주급 10파운드라는 것은 상당한 금액인 것 같은데, 피터는 약혼녀 헬렌과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결혼 자금과 결혼 후 생활 자금을 도저히 조달하지 못해 데이비드가 일부러 편의를 봐준 것. 피터보다는 헬렌쪽이 비중이 더 큽니다만, 피터가 있어야 헬렌과의 관계가 성립하니까 일단 먼저 소개.

 

피터의 약혼녀인 헬렌 배너(Helen Banner)는 20대 초반. 전쟁을 직접 겪지는 못했고, 데이비드만큼 부유하진 않지만 어렵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것 같은, 전-혀 구김 없는 밝고 당찬 아가씨. 의대에 다니는 오빠 조지가 있습니다. 피터를 좋아하고 약혼까지 했지만, 자신에게는 굉장히 똑똑해 보이고 커보이는 데이비드가 은연중에 마음에 들어서 계속 관심을 보이는 상태. 데이비드와 조안은 헬렌이 데이비드를 좋아하는 걸 눈치채고 있지만, 딱히 심각하게 여기진 않는 정도. 데이비드는 헬렌과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마음이 아직까지는 없고, 헬렌의 경우에는 "쿨한 아내"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니까, 그리고 헬렌은 피터의 약혼녀이기도 하고 헬렌 자체가 싫은 것이 아니니까 그냥 대충 넘기고 있어요.

 

데이비드의 집에 더부살이 하는, 데이비드의 친우 존 라이드(John Reid)도 주요한 캐릭터. 데이비드보다는 연상인데, 그렇게 많이 차이나는 것 같진 않고, 학교 선배인 것 같아요. 친척 관계는 아닌 것 같지만, 대학 때부터 데이비드와 조안 등과 어울려 파티를 즐기곤 했던 무리 중의 한 사람. 어떤 경위인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특별히 하는 일도 없고 데이비드 집에 아예 눌러 붙어 살고 있어요. 자기 방까지 있는데, 항상 거실의 소파에 누워 붙어 지냅니다(ㅎ) 예전부터 조안을 좋아했지만 조안에게 고백을 하진 않고 혼자서 좋아하고, 지금까지도 그런 마음으로 조안을 아끼고 있는 사람. 데이비드에게 맞춰 살아가는 조안이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조안을 행복하게 해 줄 순 없으니까 자신의 마음을 굳이 드러내진 않습니다.

 

그리고 데이비드네 집에 들락날락하는 아주 시끄러운 아줌마가 한분 있는데(ㅎ) 이름은 줄리아. 이분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음. 부유한 집의 부인 같은데, 역시 데이비드, 조안, 존과 옛날부터 어울리던 무리인 것 같습니다만, 데이비드나 조안과는 약간 달리 정말 진실로 아무 생각 없이 즐기고 떠드는 부류. 너무 말 많고 귀찮아서 다들 좀 꺼려하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고 관계가 오래되기도 해서 그냥 번갈아가면서 어울려주는 정도. 극의 갈등 구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데이비드와 조안의 겉으로 드러나는 생활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캐릭터.

 

그외에 여러 작은 조연/단역 캐릭터들이 있지만, 이 정도가 극 전체 내용상 주요한 캐릭터들 같네요.

 

인라인이미지

 

참고로 왼쪽 사진은 조안, 존, 데이비드. 오른쪽 사진은 헬렌과 데이비드. 다른 스틸샷은 이쪽으로.

 


 

공연된 무대는 영국 런던 내셔널 씨어터의 라이텔튼(Lyttelton)관. 800여석 규모의 관으로, 직사각형의 무대 공간과 무대 너비와 동일한 너비의 객석이 꽤 높은 계단식으로 늘어져 있는 관입니다. 무대 세트의 변경은 바닥의 롤러를 이용해서 횡으로 할 수가 있는데, "After the Dance"에서는 극 세트는 전혀 변경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곳에서 이루어집니다.

 

인라인이미지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는 장소는 데이비드의 집으로, 거실 부분이에요. 위 사진은 약간 오른쪽에서 찍힌 사진이라 무대의 오른쪽 부분이 조금 짤렸는데, 무대의 중앙에는 거실이, 그 우측 뒤쪽(사진에서 우측의 어두운 부분)으로 현관이 있고, 그 안쪽으로는 조안의 방과 존의 방으로 이어집니다. 물론 현관밖과 조안의 방, 존의 방은 무대에 보여지진 않는 곳이에요. 거실의 좌측면에 이어진 문은 식당으로 통하는 문, 거실의 우측면 앞쪽에는 데이비드의 서재로 이어지는 문이 있어요. 역시 식당 내부와 데이비드의 방은 무대에서는 보여지는 부분은 아닙니다.

 

거실 좌측 뒤쪽은 사진에서 보다시피 큰 베란다로 연결되어 있는데, 하늘 조명은 해당 막의 시각에 따라 낮과 밤으로 바뀌고, 커튼을 여닫을 수 있게 되어 있어요. 베란다의 나무 높이로 보면 이 층이 지상층은 아닌 걸 알 수 있는데, 2층(말하자면 1층) 이상 쯤 되는 것 같고.

 

무대의 우측 앞에는 데이비드의 책상(주로 피터가 일하는데 쓰이지만)이 있고, 전체적인 구도 상 무대 중앙에 놓인 피아노는 데이비드가 극중에 두번 정도 실제로 연주를 합니다. 베란다 왼쪽에는 축음기가 있는데, 나름 꽤 중요한 소품(ㅎ) 위 사진에서는 짤렸지만, 거실의 왼쪽면에는 벽난로 위에 거울이 있어요. 사진에서 잘 보이진 않지만 소파 뒤쪽엔 각종 술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는 테이블이 있구요.

 


 

플레이 타임은 2시간 40여분 정도. 총 3막으로, 막 사이 인터벌을 포함하면 3시간 정도의 시간. 2막을 제외하곤 막 안에서 시간 경과는 없는 편이고, 2막 역시 같은 날의 오후와 밤 정도로만 나뉘어져 있어요. 2막은 1막으로부터 1주일 후, 3막은 그로부터 6개월 후로, 전체적으로 긴 시간을 보여주는 건 아니지만, 실제로 보여지는 부분보다 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달까.

 


 

1막은 여느때와 같이 밤새 흥겹게 파티를 하고 난 어느날의 늦은 아침, 밤새 파티를 즐긴 존은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고, 옆에선 피터가 새벽 늦게까지 데이비드가 불러준 내용을 타이핑하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피터의 의상이 웹상에서 베네딕트씨 스틸컷으로 보던 양복과 스타일이 비슷해서 설마 이 연극 주연 더블 캐스팅이었나, 난 베네딕트꺼를 봐야하는데, 이거 베네딕트 나오는 거 맞냐고 물어봐야 하는건가 따위를 순간적으로 막 생각했더랬던(ㄲ) NT 아카이브 언니가 같이 준비해주신 프로그램을 뒤적였더니 왠지 생김새가 피터 같아서 좀 참고 보았지만요(ㅎ))

 

잠에서 깨어난 존은 피터에게 데이비드는 자신이 뭘 불러줬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며 그렇게 급하게 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피터는 어찌됐든 고용된 입장이니 일단은 최대한으로 해보려는 쪽. 그 조금 뒤에 일하는 고용인이 피터에게 데이비드가 타이핑한 것을 가져오라고 했다며 말하죠(ㅎ) 존과 데이비드 둘다 술과 파티에 쩔어 지내는 것은 같지만, 존의 경우에는 그저 놀고 먹는 쪽인데 반해 데이비드는 그렇게 폐인 같이 굴지는 않아요. 피터의 경우엔 아예 같이 심하게는 어울리지도 않는 쪽이고.

 

이어서 숙취에서 제대로 깨어나지 못한 조안이 잠옷 바람으로 등장하고 줄리아가 부산스럽게 등장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군 조안과 줄리아는 조안의 방으로 퇴장. 이어서 헬렌이 등장합니다.

 

피터가 약혼자라고 헬렌을 데려온 것을 그리 오래된 것 같진 않고, 1막의 시점에서 바로 전주에 데이비드가 사람들이 많은 자리(헬렌도 포함된)에서 복부(말하자면 간쪽)에 꽤 심한 통증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게 처음이었던 것 같진 않고, 간헐적으로 통증이 있었던 듯- 물론 데이비드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며 제대로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도 가지 않고, 조안 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 역시 데이비드에게 그렇게까지 강제하지는 않아요. 데이비드가 상황을 잘 드러내지 않거나 가볍게 여겨버리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거나, 혹은 조안의 경우에는 억지로 데이비드에게 맞춰서 무시해버리려는 쪽. 하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잘 굴러왔던 이 집단에 새로 찾아온 헬렌이라는 존재는 아주 다른 행동을 보여서, 데이비드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곤 바로 의사 과정을 밟고 있는 자신의 오빠를 데이비드의 집으로 데려오게 되죠.

 

그리고 바로 이때, 데이비드 초등장. 무대 오른편의 데이비드의 서재로 이어지는 문을 열고 피터가 오전 내내 타이핑한 내용의 일부분을 읽으며 등장하는데- 베네딕트씨 본인의 나이보다 약간은 연상의, 폴 마샬님이라던가 윌리엄 수상님처럼 태생부터가 고급스러운 계층의 포스에 더불어 그보다 더 강직하고 단호하고 자신감이 가득찬 자아의 아우라에, 그 목소리-!! 한결 더 낮고 굵고 탄탄한 목소리에- 이전 포스트에 뭔가 과장된 번역이라며 썼었던 "소녀들을 단번에 압도하는 카리스마"라는 문장이 전-혀 과장이 아닌 정도로 등장하지 않았겠습니까아아아아아아아이모티콘 뭐랄까, 헬렌 이년 내가 널 십분 이해한다- 이런 기분이모티콘

 

데이비드는 역시 나오자마자 술잔부터 한잔 채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하는데, 그런 데이비드에 대고 헬렌이, 당돌하게도, 의사인 자신의 오빠가 우연히 근처를 지나게 되었는데 아프다던 걸 한번 확인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식으로 말을 꺼냅니다. "그" 데이비드에게 씨알도 안먹힐 말이기도 하고, 실제로도 데이비드는 거절을 하지만, 헬렌 역시 만만치 않아서 재차 데이비드에게 진찰을 권하죠. 데이비드는 손에 술잔을 들고 대화 중에 계속 술을 한모금씩 마셔대고 있었는데, 헬렌이 이렇게 다시 부탁하는 데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일단 술잔부터 쭉 비우고 헬렌과 마주봅니다. 이 장면 데이비드 너무 박력 있어서 너무 무서웠다니- 헬렌 한대 때려도 전혀 이상할 거 없을 정도의 박력이라- 전혀 굽히지 않는 헬렌을 정면으로 마주 노려보면서 몇초동안 정적이 흐르는데 현장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완전 긴장되던 장면이었어요. 그러곤 조지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여전히 헬렌을 노려보면서 그럼 어디 진찰을 받아보자며 어차피 다른 의사들과 똑같이 말할 거고 자신은 제대로 듣지 않을 거라 아예 선언하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립니다.

 

데이비드는 극이 시작되고 20여분 후에야 처음 등장했는데, 그 이전에 주요 캐릭터들이 한꺼번에, 혹은 번갈아 등장하며 상당부분 데이비드가 언급되는 대화를 이어간데다, 초등장 장면마저도 기억에 5분 정도로 짧은 편이었지만 굉장히 그 캐릭터의 특징이 두드러지는 상황에 대사였던 탓에 데이비드라는 캐릭터는 초반부터 확실히 잡혀지는 정도. 확실히 굉장히 그 기세가 센 캐릭터인데다 주연이라 정말 베네딕트씨 너무 돋보여서 말입니다이모티콘

 

셜록으로 뜨지 않았다면 지금처럼의 유명세를 치르는 것은 늦었더래도 이런 역들을 계속 맡아가면 굉장히 연기파 배우로도 지명이 꽤 올라갔을 것 같아요. 물론 실제로도 그러고 있지만(ㅎ) 작년 연극 공연 관련 시상식에서 남우주연 후보에는 대개 노미네이트 되었어도 실제로 수상하지는 못해서 좀 안타깝긴 한데, 수상하신 분들의 공연이나 연기를 보질 않았으니 뭐라 왈가왈부 할 순 없고, 2막 정도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데이비드가 극의 전반에서 주축이 되는 캐릭터이긴 합니다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여자주인공인 조안 캐릭터가 훨씬 더 비중이 높은 것 같아요. 조안 역을 맡으신 배우분이 그렇게 상을 휩쓴 게 완전 이해가 가더라는.

 

그렇게 데이비드가 아웃된 상태에서 조안이 다시 등장해 헬렌과 잠시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헬렌이 의사를 데려와 진찰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할 때 조안은 아주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죠.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었으니까요. 데이비드가 그렇게 하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사실 헬렌이 데이비드를 언제부터 좋아했느냐-하는 것은 정확히 언급되는 것은 아닌데, 아마도 자신도 모르게 첫눈에 반해서 계속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데이비드에게 신경을 쓰는 것도 자신의 약혼자의 가족이라는 점도 있긴 하지만 데이비드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점도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고. 극 시작부터 이미 헬렌쪽이 데이비드를 좋아하는 상태로 시작되고 있죠. 그리고 그 사실을 데이비드와 조안 둘다 알고 있달까. 존 역시 알고 있고. 피터는 딱히 그렇게 단정지어 생각하는 것 같진 않지만.

 

하지만 조안은 어리고 젊은 여자가 데이비드를 좋아한대도, 설령 데이비드가 그녀에게 마음이 있대도, 그런 걸 가지고 데이비드를 구속하려 들거나 질투하는 속좁고 질리는(bored) 아내의 역할보다는 데이비드가 질려하지 않을 그런 "쿨한 아내"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데이비드의 눈치를 보면서 헬렌은 선생님을 좋아하는 학생 같은 감정으로 데이비드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데이비드에게 먼저 말을 해요. 데이비드 역시 처음부터 헬렌을 좋아했던 건 아닌 것 같구요.

 

조금 몇몇 장면이 지난 다음, 조지에게 진단 결과를 들은 헬렌이 혼자 남아 있을 때 데이비드가 방에서 나옵니다. 역시나 술잔부터 챙겨드는데 헬렌이 그걸 뺏으려 들어요. 첫번째엔 술잔을 놓쳐 떨어뜨리게 되고, 상당히 화가 난 데이비드는 애써 참아 억누르면서(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여자니까요(ㅎ)) 다시 새로 술잔을 채웁니다. 뭐랄까, 내가 너무 베네딕트만 봐서 그런건지 어떤건지 모르겠는데, 완전 저화질의 영상에 무대가 전체 다 들어가는 원거리 촬영인데다 모니터도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데이비드의 표정이나 몸짓에서 나오는 감정 하나하나가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서 말입니다이모티콘 초반에 베네딕트 한참 등장하지 않을 때는 그냥 멍하게 봤었는데, 베네딕트 등장하면서부터는 완전 몰입해서 봤겠지이모티콘

 

사실 데이비드에게 있어 헬렌이라는 존재는 "다른" 존재나 마찬가지에요. 진부하긴 하지만, 대충 "내게 이렇게 대한 여자는 처음이야" 정도의 기분? (ㅎ) 20대 초반의 젊은이 특유의 솔직함과 당당함으로 부딪혀 오는데다, 하필 시기도 시기니까요. 아무리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열정 없이 살아간다고 해도, 그런 상태에서 자신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상황인데 말입니다. 이 장면까지는 앞에서 얘기했듯이 당당하고 단호하고 자아가 아주 강고한 그런 캐릭터로 그려지긴 했지만, 실은 남들이 자신에게 "bored"한 것을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남들에게, 자기자신에게 "bored"해지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에, 자신을 솔직하게 들어내는 것을 "bored"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전하지 않는 캐릭터라는 것이 극이 진행되면서 드러나게 되요. 그리고 그런 모습을, 12년간 부부로 살아온 조안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런 모습을, 헬렌에게 조금씩 보여주게 되는 거구요.

 

이 둘이 남겨진 장면에서 헬렌은 데이비드의 손에 들린 술잔을 다시 빼앗아 술을 모두 쏟아내 버리곤, 데이비드에게 이루진 못했지만 되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냐고 묻습니다. 데이비드는 없다(였는지 이미 되었다였는지 가물가물)고 대답하는데, 거기다 대고 헬렌은 인정받는 역사작가가 되는 게 아니냐고 말하죠. 데이비드가 그 말에 거의 지나치듯이 "그건 충분히 할 수 있는 거다"라는 식의 말을 덧붙이는데(헬렌은 그냥 무시해버립니다만) 그 말에서 나는 이 데이비드라는 캐릭터가 그런 시대적인 상황과 개인적인 상황과 주변인들의 상황 속에서도 "꿈"을 갖고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달까. 물론 그 "꿈"을 이룰 "열정"을 제대로 가지지를 못하긴 했지만. 헬렌은 누군가 옆에서 지지해준다면 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바꿔 말하자면 지금의 데이비드를 부정하는 말을 하죠.

 

조안과 헬렌이 다른 게 그점이에요. 조안은 데이비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지지해주고 있달까. 그 사실을 데이비드가 미처 정확히 깨닫지 못한 것이 불행의 시작이겠지만, 조안 역시 그저 그렇게 12년이라는, 결혼 이전의 기간까지 포함한다면 더 오랜 시간을 데이비드에게 맞춰서 지내온 것이 문제였겠지.

 

극 도입 때 (데이비드가 등장하기 전에) 줄리아가 찾아왔을 때도 그렇고, 그 이후에도 틈만 나면 조안은 옛날 이야기를 해요. 옛날 이야기-라기 보담은 좋았던 때, 즐거웠던 때를 이야기해요. 그 이야기들 속에는 항상 데이비드가 있고, 항상 즐거웠고, 항상 행복했던, 그런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축음기로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며 "Avalon"을 항상 틀어요. (곡의 제목은 bc 언니의 포스팅을 참조했습니다. 곡의 제목 따위를 내가 알리가 있겠늬(ㄲ)) 유투브에서 좀 검색해보았는데, 보컬이 입혀진 버전은 이쪽. 보컬이 없는 버전은 이쪽. 극중엔 보컬이 있혀진 버전으로 나왔고, 정확히 유투브의 저 버전은 아닌 것 같지만, 어쨌건 대충 기억하고 있는 느낌이 최대한 비슷한 것으로(ㅎ)

 

헬렌은 어차피 극 도입부터 이미 데이비드에게 마음이 있는 정도의 설정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큰 무리는 없는데, 데이비드의 경우에는 딱히 그런 정도는 아니면서 헬렌에게 좀 급하게 마음이 기우는 쪽이라- 물론 아주 전-혀 마음이 없던 것은 아니고 약간의 호감은 있었던 것 같지만, 딱히 그걸 인정하거나 부정하려고는 들지 않는 정도였달까. 그랬던 것이, 물론 조안을 아주 좋아하지만, 조안과는 "다른" 헬렌에게 빠져드는 것을, 헬렌이 자신에게 이야기한 것에 반응해, 자신이 헬렌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해버리게 되는 쪽. 이 나이는 먹을대로 먹었지만, 십대 후반 이후로 딱히 정신적으로 이끌어줄 마땅한 "어른"이 없었던(이 내용 역시 헬렌이 말하는 대사에 있었어요) 데이비드는 그런 마음의 흐름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냥 휩쓸리고 마는 거에요. 자신에게는 이미 부인이 있고, 헬렌은 피터의 약혼자이며, 자신이 피터의 후견인인 상황인데도.

 


 

2막은 1막의 시점으로부터 일주일 지난 때인데, 데이비드의 집에서 저녁에 파티를 벌이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낮시간에 파티 준비로 바쁜 조안이 집을 비운 사이에 헬렌이 찾아오는데 데이비드와 조안과 피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요. 데이비드는 조안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조안이라면 당연히 이해하고 넘어갈거다, 아무런 방해도 하지 않고 이혼해줄거다-라구요. (이런 망할 자식을 보았나(...)) 헬렌은 자신이 나서서 조안과 피터에게 둘의 이야기를 하겠다고 나서는데, 데이비드는 1막 초반에 보여주었던 캐릭터와는 미묘하게 점점 달라지면서 그대로 끌려가는, 헬렌에게 맞춰가려는 모양새를 보여줍니다.

 

헬렌은 이때 데이비드의 원고를 가지고 찾아왔는데, 데이비드가 현재 쓰고 있는 책의 원고로, 읽어보고 평을 해달라는 거였어요. 헬렌은 솔직히 엉망이라고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한다고 말하며 원고를 아예 통째로 휴지통에 버려요. (실은 헬렌이 버렸는지 데이비드가 버렸는지 기억이 안난다늬(...)) 데이비드는 처음에는 헬렌의 말에 화를 내긴 하지만, 이내 헬렌에게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죠. 뭐랄까, 1막 초반에 거의 드라마틱하게 캐릭터를 잡은 것에서 극이 진행될수록 그 겉모습으로 드러난 캐릭터로부터 이면에 숨겨져 있던 캐릭터가 점점 더 전면에 드러난달까.

 

데이비드와 헬렌의 대화는 마침 존이 거의 다 듣고 있었더랬습니다. 존은 좀 냉소적으로 반응하는데, 막 열렬하게 데이비드를 막으려 들지는 않아요.

 

그 이후에 조안과 헬렌 둘이 남았을 때 헬렌이 조안에게 데이비드와의 관계에 대해 말을 꺼내는데, 그 직전에 헬렌이 조안과 무슨 대화를 했었는데 그게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네요(ㅎ) 대충 요지는 헬렌이 데이비드에 대해 무슨 얘기를 했는데, 조안은 데이비드는 그렇지 않다-라던가, 뭐 아무튼 자신과 데이비드는 12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고 데이비드에 대한 거라면 자신이 아주 잘 알고 있고 걱정하지 않는다-라는 정도의 내용이었어요. 그런 조안의 말에 조금 발끈한 헬렌이 참지 못하고 데이비드와의 관계를 말해버린, 그런 상황. 관객의 입장에서는 눈에 띄게 조안의 반응이 보이긴 했는데, 어쨌거나 금새 평정을 되찾은(가장한) 조안은 그런 일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잘됐다는 식으로 아예 축하의 말까지 해주죠.

 

헬렌은 기분 좋게 데이비드의 집을 떠납니다. 파티에 들리겠다는 말을 남기구요. 조안은 헬렌을 배웅하고-

 

무대 사진에서 보다시피, 현관은 무대 우측 안쪽에 있어서 관객과 마주보고 있어요. 헬렌을 배웅하는 조안은 자연스럽게 관객에게 등을 보이게 됩니다. 헬렌이 현관문을 열고 나가고, 그 뒤로 현관문을 닫히면서, 그전까지 웃으면서 데이비드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니 축하할 일이다-라고 말했던 그 조안이, 마치 가슴에 빗장이 걸리는 듯한 둔탁한 소리의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굳은 듯이 서서 움직이지 않아요. 아무런 배경 음악도, 아무런 대사도, 아무런 효과음도, 완전한 정적이 무대 위에 느닷없이 찾아들어서, 마치 그 정적과 한몸이 된 것처럼 조안은 그렇게 손끝하나 움직이지도 못하고 등을 보인채로 서 있어요.

 

우-------와. 정말 이 장면은 제대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늬이모티콘

 

이 장면 직전까지, 조안의 반응은, 관객으로서 대충 짐작만 할 정도로, 아 조안이 데이비드를 말로 하는 것처럼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구나- 라고 그저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존재감이 없지는 않을 정도로 차근차근히 작은 반응들을 쌓아서 보여주고 있었는데, 그게 이 장면에서 갑자기 커다랗게 조안의 어깨 위에 떨어져 내려앉은 거에요.

 

정말 기분으로는 5분도 넘게 그대로 있었던 것 같지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고, 1-2분 정도? 수십초 정도가 아니라, 최소 1분은 넘을 듯. 영상에서 관객들도 아주 쥐죽은 듯이 조용해서, 정말 같이 숨이 탁 막히는 기분이었달까. 뭐랄까, 저 등으로, 저 뒷모습으로, 말하고 있는 듯 했달까.

 

그렇게 움직이지 못하던 조안이 마침내 뒤돌아서 몇걸음 걸어나오다가 결국은 오열을 터트리게 되는데, 조안과 관객 모두, 그렇게 깨닫는거에요. 내가/조안이 데이비드를 정말로 사랑하는구나. 나에게/조안에게 데이비드는 꼭 필요한 존재구나. 늘 데이비드에게 맞춰서 즐거운, 즐거웠던 일들만을 이야기하고,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는 쿨한 아내가 되려고 했던 그런 모든 것들이 데이비드의 곁에 있고 싶어서, 데이비드에게 버려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는 할 수 없었다는 걸 말이에요.

 

사실 이 장면 전까지는, 글쎄, 상을 받을만한 정도의 캐릭터와 연기인가- 하는 마음가짐으로 보고 있었는데, 그렇잖아요. 이렇게 카리스마 철철 넘치는(ㅋ) 베네딕트는 노미네이트만 실컷 되고 상 하나 제대로 받질 못했는데, 이 부인 역의 배우분은 어째서 여기저기서 상을 휩쓴 것이지-랄까(ㅎ)

 

이때 존이 등장해 울고 있는 조안을 보게 됩니다. 이미 데이비드와 헬렌의 관계를 알고 있는 존은 사태를 알아차리곤 별 말 없이 조안을 그저 안아줘요. 조안은 존을 끌어안고는 더 목놓아 울면서, 그제서야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이 데이비드를 진정으로 사랑하며, 자신에게는 데이비드가 꼭 필요하다는 말을 하죠. 직접적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데, 존은 조안의 편이랄까, 굉장히 조안을 아끼는 쪽. 3막에서는 헬렌의 입을 빌어 존이 조안을 좋아한다는 대사도 나옵니다. 하지만 조안은 데이비드를 좋아하니까, 그리고 그걸 존은 알고 있으니까, 자신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쪽. 그런 존은 조안을 다독이며 데이비드에게 사랑한다 말하고 붙잡으라고 하지만 조안은 이미 늦었다고 말해요. 그리고 데이비드가 등장. 조안은 재빨리 자리를 옮겨 무대의 왼편 구석으로 옮겨가선 울고 있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하죠.

 

데이비드와 존이 퇴장하고, 조안은 뒤돌아 거실을 둘러보다가 휴지통에 버려진 데이비드의 원고를 보게 되요. 의아하다는 듯이 반응하며 휴지통에서 원고를 꺼내 손으로 매만지는데, 데이비드가 다시 등장. 데이비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그건 쓰레기다"라고 말하는 데에 "그래도 나중에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 읽어보면 재미있을 거에요(추억이 될 거에요)"라고 말하며 데이비드의 책상 서랍에 곱게 넣어둬요. 조안과 헬렌이 다른 게 바로 이런 점들이랄까.

 

조안은 딱히 헬렌과 데이비드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이혼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말하거나 질투를 한다거나 하지 않아요. 되려 위자료를 잔뜩 받아 부유한 이혼녀의 자격으로 유럽 어디 휴양지에 가서 즐길 거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요. 데이비드는 대화 초반에는 조안이 보여줄 반응에 대해 다소 걱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데, 조안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서 안도하면서, 이혼을 하더라도 계속 지금까지처럼 지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실은 데이비드 역시 조안을 좋아하고 있달까. 조안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곤 파티 준비를 마무리하러 퇴장. 그리고 헬렌에게 이야기를 들은 피터가 데이비드를 찾아옵니다. 데이비드는 딱히 미안한 기색도 아닌채로 대응하고, 피터는 다시는 보지않겠다며 집을 나가버려요. 혼자 남겨진 데이비드는 망설이다 소파 뒤쪽의 술병들이 진열된 테이블로 가 술잔을 채웁니다. 그 왜 스틸샷 중에 베네딕트 단독샷으로 정면을 보면서 술병과 술잔을 들고 있는 스틸샷이 바로 이 장면. 1막 때 헬렌에게 술잔을 빼앗긴 이후에는 존이 "자네 술잔을 놓고 갔어"라며 데이비드에게 술잔을 챙겨줄 정도로 아예 눈에 띄게 손에 대질 않는데, 그 이후로 처음으로 다시 술잔을 잡게 됩니다. 뭐랄까, 조안의 반응 역시, 그 반응에 대한 자신의 반응 역시, 그리고 피터의 일 역시 데이비드를 내심 괴롭히고 있는 거겠지.

 

그리고 딱 그 장면에서 무대 조명이 꺼지고 베네딕트씨만 조명을 받은 채로 정지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몰려나와 주변에 자리를 잡아요. 막 중단 없이 그날 밤의 파티로 건너뛰는거죠. 베네딕트 단독 조명 받는데 완전 멋있었다늬(...) 젱장. 직접 무대 앞에서 본 사람들은 어땠을까!!!!! 이모티콘

 

잠시 소란스런 파티가 이어지고, 데이비드와 조안은 서로 부딪히지 않은 채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여전한 모습으로 시간을 보내고, 헬렌이 찾아오고, 사람들이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결국엔 모두 식당으로 퇴장하고, 조안과 데이비드 둘만 남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을 부르러 가자는 데이비드를 붙잡고 조안이 피아노를 연주해달라고 해요. 데이비드는 이전에도 (아마도 1막 후반이었던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다른 사람들의 청을 받아들여 "Dinah"를 흥겹게 연주하다가 (곡 제목 역시 bc 언니의 포스팅에서 참조(ㅎ)) 혼자 남겨지면서 느릿한 선율로 바꿔 연주하는 장면이었어요.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과 그렇지 않은 모습의 차이를 다소 드러냈던 장면이랄까. 흥겨운 멜로디는 대충 이런 느낌.

 

조안은 데이비드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Avalon"을 연주해달라고 합니다. 떠들썩한 옆방에 비해 차분한 거실 안에서, 둘만이 남아, 예전의 좋았던 때를 떠올리게 하는 선율을 연주하는 데이비드와, 그런 데이비드의 뒤로 다가와 가만히 그의 목을 끌어안는 조안. 스틸샷 중에 피아노 앞에 앉은 베네딕트를 붉은 드레스의 여자 배우분이 끌어안고 있는 그 스틸샷이 바로 이 장면. 데이비드가 연주를 멈추자 조안은 그대로 계속 연주를 해달라고 말해요. 그 아득한 피아노 멜로디가 이어지는 가운데-

 

조안은 데이비드를 끌어안은 팔을 풀고.

달이 밝게 비치는 베란다로 나가.

그 뒤로 커튼을 닫아요.

 

사람들이 다시 떠들썩하게 돌아오고, 데이비드는 여전히 피아노 연주를 계속하고, 사람들이 묻혀 돌아온 존은 조안이 보이지 않아 희미하게 흔들리는 커튼을 열고 베란다로 나가선-

 

그대로 경악한 몸짓으로 뒷걸음질 쳐 들어옵니다.

 

하지만 여전히 파티의 소란함은 그대로. 아무도 그런 존을 금새 눈치채지는 못해요. 데이비드조차도.

 


 

3막은 그로부터 6개월 후. 조안역의 배우분은 더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조안이라는 캐릭터가 2막까지해서 어마어마한 무게를 지니게 되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끝까지 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달까. 확실히 데이비드라는 캐릭터는 전체 극의 주축이 되긴 하지만, 전체적인 극의 갈등 구조라던지, 진행 방향에 끼치는 영향력 등에서 조안 쪽이 더 비중이 큰 느낌이에요.

 

피터는 연락 두절. 존은 조안이 없는 데이비드의 집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 맨체스터로 이사를 나가려는 날. 헬렌은 여전히 데이비드에게 연정을 가지고 데이비드의 집에 드나들고 있습니다. 헬렌은 데이비드에게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자는 제안을 계속 해온 것 같은데, 데이비드가 지지부진하게 끌고 있는 듯한 상황. 아무래도 조안이 죽은지-자살한지 6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피터를 대신해서 타이핑 일을 할 다른 고용인을 구했는데, 일이 없을 때는 항상 뜨개질을 하는 부인이에요. 이 부인이 헬렌과 단둘이 남게 되었을 때 좀 의미심장한 말을 하죠. 이 집의 여주인이 6개월 전에 베란다에서 투신해 자살을 했다는데, 자신이 베란다와 그 아래를 좀 체크해보았다면서, 알려진 이야기들을 종합해 볼 때, 그날은 굉장히 어두웠고 여주인은 술에 취한 상태였고 (베란다가 낮다던가 뭐라던가) 그 상태에서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있다가 아래쪽에서 누군가 불렀거나 해서 취한 상태에서 별 생각없이 몸을 돌려 내려다보려고 했다면 충분히 떨어질 수 있었다- 라는 식의 이야기를 말이에요. (정확하진 않은데, 어쨌거나 대충 저런 내용)

 

뭐, 별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되짚진 않고 그런 이야기를 흘린채로만 넘어갔지만. 다른 캐릭터들은 모두 그저 조안이 자살한 것으로 당연시하고 있는 상태로 극은 계속 진행됩니다. 그 부인이 이 이야기를 할 때의 헬렌의 반응이 정확하게는 기억이 나질 않는데, 좀 화가 났다고 해야하나, 그런 정도의 반응이었던 것 같고. 하지만 극이 끝날 때까지 다시 언급되지는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대본의 의도로는 그저 그런 가능성도 열어둔 것 같아요.

 

데이비드는 헬렌의 요청에 따라 아직 집을 옮기진 않았지만 거의 그렇게 할 정도인 터라- 술도 끊었고, 헬렌이 시키는대로 매일 밤 책을 쓰겠다---고 말은 하지만 책은 여전히 못쓰는 상태(ㅎ) 헬렌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데이비드를 좋은 쪽으로 바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도. 데이비드 역시 딱히 거부하지는 않고 따라가려고는 하는 상태.

 

그런 중에 피터가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다 돈을 구하러 어쩔 수 없이 데이비드에게 찾아옵니다. 데이비드는 피터에게 좋은 소리 한마디 듣지도 못하면서 일단 수표는 써주는데- 딱히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사과한다거나 하진 않아요. 기억이 맞다면, 되려 헬렌이 나를 선택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도의 뉘앙스의 말도 했던 것 같은데(ㅎ) 나는 아직도 너의 후견인이고, 널 돌봐주고 싶다. 하지만 헬렌을 포기할 수는 없다. 정도. (이 쌈싸먹을 자식 같으니(...)) 그리고 주요 캐릭터들이 이런저런 관계와 사건에 얽혀 변해가는 와중에도 여전히 변함없는 줄리아 아주머니가 등장해선 피터를 그날 밤의 다른 파티에 초대를 합니다.

 

그러고보니 피터가 떠나기 전에 헬렌이 등장해서 둘이 만나게 되는데, 헬렌은 역시 전-혀 피터에게 죄책감이라던가 그런 걸 가지지 않은채로, 다음날 같이 저녁 식사를 하자고 약속을 받아내기도 하고이모티콘

 

어쨌거나, 헬렌마저 퇴장. 존이 슬슬 떠날 시각이 되어서 데이비드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데, 조안과 헬렌에 대한 이야기가 오갑니다. 데이비드에게 헬렌을 포기하고 피터에게 보내주라고, 조안이 죽은 것은 네 책임이라고, 헬렌을 놓아주지 않으면 헬렌 역시 그렇게 될 거라는 요지의 말을 하죠. 물론 데이비드는 엄청나게 화를 냅니다만, 이번에는 존이 데이비드를 봐주지 않고 아무도 데이비드에게 하지 않았던, 데이비드 그 자신조차도 외면하고 있었던, 그런 말을 해줍니다. 헬렌을 피터에게로 보내주고, 이곳에서 사라져 헬렌에게서 잊혀지라고.

 

여기서 존이 그래요. 헬렌과 조안이 다르다고 말하지만, 전혀 다르지 않다. 헬렌과 조안은 같다고 말이에요. 네가 처음 만났던, 12년 전의 그 조안을 떠올려보라고, 헬렌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덜하지 않았다고, 헬렌과 마찬가지로 데이비드 너를 사랑했지만, 그랬기 때문에 이때껏 "조안"으로 살아왔다고, 그런 조안을 네가 버린 거라고. 어째서 헬렌을 사랑하는지, 어째서 헬렌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헬렌에게서 누구를 보는지 생각해보라는 말을 하죠. 아-아-아, 물론 이 내용이 전부 정확하게 대사로 나온 건 아니고, 일부는 실제로 대사로 나왔지만, 일부는 그 전체 장면에서 느낀 내 감상이기도 합니다. 어떤 대사가 실제로 나온 대사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음(ㅎ)

 

실제로 극 무대 위에서 헬렌과 조안이 직접적으로 동일시 되는 장면은 없었어요. 하지만 조안이 극 초반부터 계속 작게작게 보여준 데이비드에 대한 여러가지 반응들과, 2막 중간의 그 극적인 전환 장면, 그리고 2막 끝의 비극적인 장면까지 이어지면서, 존의 저 대사가 저 시점에서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달까. 그리고 동시에 데이비드 역시 존이 처음 말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격렬하게 분노를 표했으면서도 결국엔 존이 말하는 의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요. 극 초반에는 정말로 데이비드-베네딕트 때문에 몰입했었는데, 갈수록 극 자체에 몰입이 되는 그런 정도의 진행이랄까 . 확실히 어째서 작년에 있었던 연극 공연들 중에 굳이 이 공연이 수상을 했는지 완전히 납득할 것 같고.

 

존마저 떠나고, 이제는 조안이 있었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집에 혼자 남겨진 데이비드는 집사 역할을 하는 고용인을 불러 더이상 이곳에서 일하지 않아도 된다며 떠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퇴장하고, 저녁 시간이라 어두워진 가운데, 아무런 웃음 소리도, 아무런 노래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집안에 혼자 남은 데이비드는, 아마도 6개월 동안 계속 닫혀 있었을 커튼을 그제서야 가만히 열고, 안쪽에 선 채로 가만히 바깥을 바라봅니다.

 

조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관객에게는 등을 진채로.

 

그리곤 차마 섣불리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베란다 난간 끝까지 나가보곤 서둘러 돌아 들어와 커튼을 닫아버리긴 했지만.

 

조안의 죽음을 처음으로 마주 본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자신 역시 조안을 사랑했음을, 서로가 서로에게 솔직하게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고, 서로에게 "bored"해질 거라는 그런 막연한 두려움을 가진채로, 어쩌면 꿈도, 희망도 제대로 누릴 수 없는 이 혼란스럽고 어둡고 외롭기만한 시대에 그 누구보다도 더 강하게 서로를 지탱해줄 수도 있었는데, 가엾게도 어떻게 그 손을 내밀어 서로를 끌어안아 줄 줄을 알지 못해서.

 

데이비드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책상 서랍을 뒤져(기억에 이때 조안이 넣어두었던 원고를 다시 봤던 것 같은데 이게 내 상상인지 실제였는지 모르겠다늬(ㄲ)) 어디론가로 전화를 합니다. 수화기 너머에는 한창 떠들썩한 파티가 진행되고 있는 듯이 목소리를 높여 가볍게 즐기던 지인과 몇마디 나누곤 피터가 그곳에 있냐며 물어봐요. 피터와 연결이 된 데이비드는 내일 저녁의 헬렌과의 저녁 약속(데이트)에 꼭 나가라며 신신당부를 하곤 다시 지인과 통화를 하며 평소와 같이 다음날 만날 이야기를 하죠.

 

그렇게 떠들썩한 전화를 끊고, 막이 내립니다.

 


 

데이비드는 물론 그곳을 떠났겠죠. 아 정말 데이비드 가여워서 너무 슬퍼졌더랬습니다이모티콘 정말 이전에 읽었던 기사들은 대략의 플롯만 나와 있었지, 상세한 줄거리는 없었기 때문에 조안이 죽는 장면에서 진짜 심장이 갑자기 덜컥- 처음엔 너무 극단적인 진행이라고도 생각했지만, 3막 진행되면서는 딱히 그런 감정은 들진 않았고. 아무래도 그 시대상이라던지, 캐릭터들의 성격과 그들이 지내온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말이에요.

 

베네딕트씨 비록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연기가 아주 훌륭했던 게, 초반의 그 "카리스마"적인 모습은 대체로 데이비드의 겉으로 드러나는 캐릭터니까 말이에요. 실제로는 굉장히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캐릭터인데, 그런 점이 가면 갈수록 너무 잘 드러나기 때문에- 결국엔 너무 마음이 아파서 미치는 줄이모티콘이모티콘이모티콘이모티콘이모티콘

 

주로 데이비드와 조안 위주로 이야가하긴 했지만, 조안이 파티 준비를 하며 존과 헬렌, 데이비드를 위해 선물을 사온 에피소드라던가, 줄리아 아주머니가 데리고 다니던 훈남 청년은 군대 자원 입대한다던가, 뭐 이런저런 소소한 소재들도 꽤나 극 전체에 적절하게 배치된 것 같았고. 어쨌거나, 정말 멋진 극이었습니다. 제대로 뭘 리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게 천추의 한이 되겠지(...)

 


 

포스트를 쓰려고 계속 극의 내용을 생각하는 중에, 개인적으론, "빙 줄리아"라는 영화가 굉장히 많이 떠올랐는데, 조안이 "빙 줄리아"의 줄리아와 같은 선택을 했더라면- 하는 생각도 들어요. 물론 작가님의 의도라던가 시대상이라던가 주제에는 맞지 않겠지만(ㅎ) 뭐, 그냥 바램이죠. 그럼 해피엔딩이니까(ㅎ) 조안이라는 캐릭터는 충분히 "빙 줄리아"의 줄리아와 같은 캐릭터가 될 수도 있는 정도의 캐릭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랬다면 정말로 멋졌겠지. 헬렌도 물리치고 데이비드의 사랑도 얻고 결국엔 행복해지고야 마는- 뭐, 그런 상상을 하면서 조금이나마 아픈 마음을 달래본다는이모티콘이모티콘이모티콘이모티콘이모티콘이모티콘이모티콘이모티콘

 

뭐어, 어쨌거나, 베네딕트의 데이비드는, "빙 줄리아"의 제레미 아이언스님만큼이나 멋지긴 했습니다이모티콘